암보험도 '선결제 시대'…보험금 지급 패러다임 바뀐다
그래픽=챗GPT
암보험 시장의 경쟁 구도가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암 진단 시 얼마를 지급하느냐가 상품 경쟁력의 핵심이었다면 최근에는 '언제 지급하느냐'가 새로운 경쟁 요소로 떠오르는 모습이다.
8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생명보험사와 손해보험사들은 최근 암 치료비를 실제 치료 전에 먼저 지급하는 선지급 특약 도입을 잇달아 확대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미래에셋생명이 이달 '치료비 선지급 서비스 특약'을 출시했다. 해당 특약은 암 수술이나 항암약물치료, 항암방사선치료 일정이 확정되면 예약증 등을 통해 가입금액의 50%를 최대 500만원 한도 내에서 먼저 지급하는 구조다.
하나생명 역시 이달부터 '하나로 라이트 3·10·5 간편건강보험', '하나로 누리는 건강보험' 등에 암 주요치료비와 특정순환계질환 주요치료비를 선지급하는 구조를 도입했다. 치료가 확정되면 가입금액의 50%를 최대 500만원 한도에서 지급한다.
앞서 DB생명은 지난 4월 암 주요치료비의 최대 70%를 먼저 지급하는 특약을 출시했고, 신한라이프도 지난달 암 주요치료비 선지급 구조를 건강보험 상품에 반영했다.
손해보험업계에서는 메리츠화재가 지난해 11월 업계 최초로 관련 담보를 선보인 이후 DB손해보험, KB손해보험, 현대해상 등이 잇달아 유사 상품을 내놓으며 시장이 빠르게 확대되는 분위기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불과 1년 전만 해도 생소했던 구조가 이제는 주요 보험사들이 경쟁적으로 도입하는 새로운 상품 트렌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보험사들이 지급 구조를 바꾸고 있는 배경에는 암 치료 환경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기존 보험은 치료를 받은 뒤 진료비 영수증 등을 제출해 보험금을 청구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치료 시작 전부터 상당한 비용이 발생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특히 중입자치료와 표적항암제, 면역항암제 등 고가 비급여 치료가 확대되면서 환자들의 초기 자금 부담도 커지는 추세다.
실제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지난 2024년 기준 암 수술 평균 대기 기간은 43.2일로 집계됐다. 수술까지 31일 이상 기다린 환자 비중도 49.6%에 달했다.
암 진단 이후 실제 치료까지 한 달 이상 소요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 만큼, 환자 입장에서는 치료 준비 단계에서 필요한 자금을 미리 확보할 수 있는 수요가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또 다른 보험업계 관계자는 "암 진단 직후에는 치료비뿐 아니라 간병비와 생활비 부담도 동시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며 "선지급 구조는 치료 전 자금 공백을 줄여 달라는 고객 수요가 반영된 결과"라고 설명했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변화를 단순한 상품 구조 변경 이상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그동안 암보험 시장은 진단금 규모 확대 경쟁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주요 보험사들의 보장 수준이 상향 평준화되면서 차별화 여지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반면 선지급 특약은 고객 체감 효과가 크다. 동일한 보험금이라도 치료가 끝난 뒤 받는 것과 치료 전 필요한 시점에 받는 것은 효용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실제 보험사들도 최근 상품 마케팅 과정에서 보장 금액뿐 아니라 치료 전 지급 여부를 주요 경쟁 포인트로 내세우고 있다.
이에 보험업계 안팎에서는 보험 상품 경쟁이 단순 보장 규모 중심에서 고객 경험 중심으로 이동하는 흐름 속에서 앞으로는 얼마를 지급하느냐보다 고객이 가장 필요로 하는 시점에 얼마나 신속하게 지원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경쟁력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금융권에서는 이런 흐름이 암보험에 그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간병보험과 치매보험, 중증질환 보장 영역에서도 선지급 구조가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보험산업이 전통적인 사후 보상 중심 산업에서 치료와 회복 과정을 지원하는 서비스 산업으로 진화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며 "향후 보험사의 경쟁력은 보장 금액뿐 아니라 고객이 가장 어려운 순간에 얼마나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느냐에 의해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이연호 기자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
출처: https://www.businessplus.kr/news/articleView.html?idxno=112653